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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腦

개념어 사전

nikolai 2016. 5. 14. 13:00

개념어 사전, 남경태, 2012년

아날로그 블로그. 이 일곱 글자가 이 책을 요약한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남경태라는 이름은 비잔티움 연대기 번역본을 통해서 처음 접했다. 역자가 추가한 주석이 처음에는 흥미롭다가 뒤로 갈 수록 진지한 역사와는 거리가 먼 만담급의 소설로 변화하는 것이 그저 그렇다는 인상을 남겼다. 문맥을 놓친 번역도 그런 부정적 인상에 일조했다. 영어속담에 관한 역자의 무지때문에 발생한 단어대치는 고등학교 영어시간에 역자가 무엇을 했을까 상상해보는 기회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 후에 발번역대가를 발견한 이후로는 다른 모든 오역들은 업무상 실수 같아 보인다는 것은 명시해야겠다.)

그런 부정적 인상을 뒤로하고 내가 이 책을 뽑아 들은건 얼마전에 읽기를 마친 한 글쓰기 책에서 좋은 글의 예제로 이 책의 한 부분을 소개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좋은 문장이길래’하는 생각에 일단 저자에 대해 검색을 했다. 알고 보니 저 사람의 번역서를 내가 이미 여러 권 읽었다. 정치적/법적 이유로 자기 이름을 번역자로 밝힐 수 없는 번역서라서 몰랐던 것일뿐.

“사전”이라는 제목은 훌륭한 마케팅이다. 이건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짤막한 글들을 모아 표제어를 붙인 것이 (백과)사전과 비슷하게 보인다는 것에서 착안했겠지. 하지만 쭉 읽어보면 논제로 단어 하나 주고 글쓰기 연습하면서 쓴 단문들을 모아놓은 것 같다. 그 단문들의 구조가 다 똑같다. 변죽을 울리는 도입 두어 문단, 명확하게 정의하지 않고 두루뭉실 뭉개는 미괄식 표제어 정의 문단, 나머지는 저자가 생각나는대로 늘어놓는 수필. 이런 정해진 형식이 몇번 반복되니까 지겹다. (도대체 그 글쓰기 책의 저자가 좋은 글이라고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표제어의 선정도 저자의 운동권 경력과 취향을 반영하고 있다. 그 표제어들을 설명하고 그것에 덧붙이는 저자의 주장도 마찬가지로 저자의 경력과 취향을 드러낸다. 재미있는 것은 그런 좌편향의 흐름 속에 숨어있는 “신자유주의적”인 저자의 무의식이 문득문득 드러난다는 점이다.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은 저자의 박학다식(博學多識)함이 미치지 못하는 분야까지 설명하려고 하다보니 저자의 (博學이 아닌) 薄學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흔한 고정관념 속의 문과생의 모습대로이다. 자연과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데도 이를 어떻게든 “말빨”로 커버해보려고 애쓴다. 예를 들자면 카오스 이론에 대한 수필은 수학공부는 고사하고 그 유명한 제임스 글릭의 교양서라도 읽어는 봤는지 의심스러운 수준이다. 사회과학에 대해서도 그런 면모가 보인다. 저자가 웬만한 사람보다는 사회과학 공부를 많이 한 것은 분명한데 통달했다는 느낌에는 2% 부족하다. 예를 들면 책 뒤에 레닌의 제국주의 팜플렛에 대해 극찬을 해놓은 것을 보면 이 사람은 힐퍼딩의 책을 안 읽어본 것 같다. (보통사람이라면 번역서 없는 힐퍼딩의 “금융자본”를 읽을 기회가 없겠지만, 운동권 서적 번역을 업으로 삼던 저자가 이런 좌파이론상의 지적 공백을 남겨두었다는건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긴다.)

그래서 다시 맨 처음의 일곱자 요약으로 돌아온다. 아날로그 블로그. 80년대에 운동권 선배가 허세를 부리며 신입생들 꼬드길때에나 써먹었을만한 “썰”이지 21세기의 인문교양을 위해 읽을 책은 아니다. 진지한 인문교양을 원한다면 목차에 나오는 표제어만 적어 놓고 관련된 서적을 찾아 읽는게 낫다. 그게 자연과학 표제어건 사회과학 표제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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