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右腦

보이지 않는 수호자

nikolai 2014. 12. 26. 11:00

보이지 않는 수호자 (El guardián invisible), 돌로레스 레돈도, 2014년 우리말 번역본

처음 책을 집어들었을때 표지의 감촉이 나의 첫 Thinkpad를 기억나게 했다. 우레탄 코팅이 되어있는 상판의 독특한 느낌에 매료되었던 그 기억에 더 따지지도 않고 이 책을 집어들었다. 늘 그렇지만, 그런 식으로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내린 결정은 항상 후회로 이어진다.

뒷 표지에 광고문구 겸으로 박아 놓은 글귀는 좀 있어 보인다. “청소년의 미래를 보호할 능력이 없는 사회는 실패한 사회이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다시 본 이 광고문구는 정치 상업주의의 전형이다. 마치 책 내용이 올해 봄에 있었던 다른 사람들의 불행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슬쩍 찔러놓지만, 그런 내용은 주인공의 한차례 독백으로만 나올 뿐이다. 그런 정치 상업주의에 거부감이 없다면, 시간때우기에 적당한 소설이다.

뒷표지에도 반복되는 광고와는 달리, 이 책은 그냥 흔한 미국식 범죄드라마/스릴러에 스페인 옷을 입힌 듯한 느낌이다. 물론, 이미 있는 것에 새 옷을 입힌다고 나쁜건 아니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스페인의 독특함을 보여줄 것 같이 써놓았던 광고에 속았다는 것이 떨떠름하다. 스페인 풍이라고 확연히 느껴지는 것은 천주교가 등장인물들의 삶의 일부분이라는 것과 음식 이름들 뿐이다. (전설은 내가 전혀 몰랐던 부분이니까 신기하기는 한데 딱히 스페인 풍이라기보다는 그냥 새롭다는 느낌이다.) 그 외에는 그냥 흔히 볼 수 있는 미국 드라마이다. (차라리 우디 알렌의 Vicky, Crista, Barcelona가 더 스페인 풍이라 느껴진다면 심한건가?)

읽어 나갈 수록 몇몇 헐리우드 영화/미국드라마가 이 책에 겹쳐 보인다. 책을 조금 읽은 순간 떠오른건 알 파치노가 자기 과거에 발목이 잡혀있는 형사로 나온 Insomnia였다. 물론 Insomnia의 형사를 발목잡는 과거와 이 책의 주인공의 과거는 판이하게 다르지만, 바로 설정의 유사성이 떠오를 정도로 뻔한 것도 사실이다. 좀더 지나서 생각난건 오래된 드라마 Twin Peaks였다. (비정상적인 방법—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저자가 벌여놓은 일을 주체 못해 사용하는 deus ex machina—을 사용한다는 유사성은 Twin Peaks말고도 더 있는데 지금 제목이 생각이 안난다.) 주인공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점점 더 나오면서 제목은 기억이 안나는데 어렸을때 당한 폭력을 딛고 일어서 경찰이 되었다는 설정으로 진행되던 범죄드라마가 떠올랐다. (이런건 너무 많아서 기억이 안나는게 당연한건지도 모른다. 주정뱅이 아버지의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아들이나 아동성폭력의 피해여아가 성장해서 경찰되는 설정은 정말 많다.) 범인의 배경설명을 보면서 Psycho와 Equus가 기억날 수 밖에 없는건 그게 그만큼 많이 사용된 성격 설정 방법이기 때문일 것이다. 토마스 해리스는 분량 늘리기 위해 쏟아놓은 배경조사에 직접 언급했으니까 오마쥬라고 해줄 수도 있겠다. CSI같은 드라마도 간접적으로 언급하면서 슬쩍 까대는 것도 더했으니까 그것도 오마쥬라고 해주자. (오즈의 마법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참조하는 것은 나도 바로 알아볼 정도니까 완전히 국제화된 명작이라서 원래 스페인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참조하는 것이라고 무작정 믿고...)

그렇게 수많은 범죄드라마의 혼성모방임에도 사건의 진행은 맥이 풀려있다. 스릴러라는 광고가 무색하다. 아마도 트와일라이트 시리즈를 뱀파이어와 늑대인간이 나오는 공포물로 받아들이는 사람을 생각하고 광고문구를 작성한 것 같다. 가짜범인은 등장부터 너무 뻔하게 가짜임이 보이고 마지막의 파국은 엉성하다. 범인을 알고 있지만 그를 싫어하는 사람이 범인을 숨겨주기 위해 주인공을 뺑뺑이 돌리는 식으로 진행하다가 파국에서 하는 말에서는 영 앞뒤 안맞는 소리를 하고 있다.

번역도 급조하느라 여러사람이 번역한 티가 난다. (물론, 지난번에 말한 목숨걸고 피해야 하는 번역본같이 말도 안되는 번역은 아니다.) 책을 시작하는 이름이면서 계속 여러번 반복되는 이름이 뒤에 가면 스페인어 철자와 읽기를 전혀 못하는 사람이나 할 발음으로 적혀 있는 것을 보면 과연 스페인어 원본을 직접 번역한 것인지도 의문이 생긴다. (이런건 왜 편집자가 잡아내지 못하는걸까? 요즘은 교정을 컴퓨터 철자 검사기에만 넣어 돌리는 과정으로 끝내는걸까?)

앞표지 날개에서 이 책은 3부작의 첫권임을 미리 광고하고 있지만, 앞으로 (1권과 같은 값을 유지한다는 전제하에) 3만원을 더 투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누가 2부와 3부를 가지고 있다면, 시리즈의 뒷 이야기 전개가 어찌되는지 빌려 볼 생각은 있지만, 소장하고 싶지는 않다. 비유하자면, 명절에 TV에서 틀어준다면 보지만 극장까지 가서 보고 싶지는 않은 영화와 같다. 딱히 할 일 없을때 앞뒤 따지지 말고 그냥 쭉 읽어내려가면 시간은 잘 갈 것 같다. (남자 독자라면 이른바 chick lit 요소에 거부감이 없어야 한다는 조건도 있기는 하지만...)

@ 써놓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검색을 해봤다. 역시 제일 많이 나오는건 출판사의 마케팅 블로그다. 그중에 맨 처음 나오는 것을 눌러봤더니, “여자들이 좋아하는 스릴러”라는 딱지를 붙여놓은 사진이 있다. 그러니까, 내가 트와일라이트 시리즈를 떠올리면서 스릴러라기보다는 chick lit에 가까운 책이라고 느꼈던게 잘못된게 아니었던거다. 이 책을 읽을 생각에 미리 평을 검색해보는 남자 독자라면 chick lit 면역력이 필요하다는 것에 확신이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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