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左腦

비엔나: 천재들의 붉은노을

nikolai 2014. 4. 21. 20:00
비엔나: 천재들의 붉은노을 (Fin-de-siècle Vienna: Politics and Culture), 칼 쇼르스케, 2010년 우리말 번역본

내가 이 책에 막연한 관심을 가진 것은 홉스봄이 “제국의 시대”에서 여러번 인용하고 언급해서였다. 무슨 책이길래 본문에서도 인용하고 본문 뒤의 더 읽어볼 책 목록에 올려서 독자에게 권했을까? “제국의 시대”를 읽을 당시에는 원서도 번역서도 서점에는 없었고 외국에 주문해서라도 읽고 싶을 정도로 궁금증이 크지는 않아서 그냥 그렇게 잊혀졌다.

얼마전 할 일 없이 책방을 방황하다가 우연히 맞닥뜨린 이 번역본은 나를 살짝 흥분하게 만들었다. 하드커버에 화려한 장식을 넣은 표지, 컬러 화보, 멋진 절 번호 장식 등등 휘리릭 책장 넘기면서 받은 외관에 대한 인상은 환상적이었다. 큼직한 본문 글씨와 두꺼운 종이야 요즘 우리나라 책에 공통된 낭비지만, 그것이 오히려 화려한 외관을 과시하는 듯 보인다. 내가 읽은 판본은 2006년에 번역해서 나온 책이 출판사가 바뀌어 2007년에는 같은 제목으로, 2010년에는 제목이 바뀌어서 나왔다.

내용이 얼마나 바뀌어서 세번이나 찍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머리말”부터 읽기 시작하면서 뭔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머리말이 뭐 이렇게 긴지 절을 다 나누어 놓았다. 휘리릭 페이지를 넘겨보니 주석까지 4개나 달려있다. 이거 보통 Preface를 번역하는 머리말이 아니라 Introduction을 머리말이라고 번역했나? 구글을 통해 원서의 목차를 찾아보니 내 추측이 맞았다. 그래, 뭐, “서론”보다 “머리말”이라고 하는게 나을 수도 있겠지. 다 읽고 보면 이미 발표한 논문들을 모아서 책을 만들면서 1장을 서론의 역할을 하게 했으니깐, 그런거까지 고려해서 머리말이라고 번역제목을 달았을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들어가며”라고도 쓰지만, 그렇게 격식을 배제한 제목은 고급 교양서에는 안 어울릴 것도 같다.

번역이 살짝 어긋나 있는 것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번역자가 modern을 “현대”로 번역한 것에 대해서는 후기에 의도적이었음을 밝혔으니 그건 빼자. 중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단어를 한 뜻으로만 번역한건 어쩔 수 없는 언어 사이의 차이라고 치자. 그렇게 봐도 심하게 우리말이 안되는 곳이 여러군데 나온다. 예를 들자면

지테는 균일한 격자 형태에 반대하여 고대와 중세 도시의 공간 조직이 보여주는 자유로운 형태를 찬양했다. 제도판이 아니라 “자연속에서” 나타나는 불규칙적인 거리와 사각형 말이다. (p. 108)
도대체 무슨 소리냐, 불규칙적인 사각형이라니? 사각형의 크기가 불규칙하다고? 그게 도시의 거리하고 무슨 상관인데? 원문은
Against the uniform grid, Sitte exalted the free forms of ancient and medieval city-space organization: irregular streets and squares, which arose not on the drawing board but “in natura.”
라고 나온다. 비엔나의 재개발과 건축에 대해 논의하는 맥락에서, 그것도 지테에 대한 설명에서 “광장”이라는 번역을 생각해낼 수 없어 “사각형”이라고 했다면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내가 읽고 이해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원문이 아닌 엉뚱한 내용이 아닐까? 오래전에 “자본의 시대”를 번역서로 보다가 화가 나서 던져버리고 원서를 구해 읽은 그 기억을 떠오르게 해준다. 덤으로 “찰스 버드”가 유명 사학자 Charles Beard라는건 이 책에서 처음 알았다. (p. 20)

이상한 번역이 나오는 이유는 많다. 번역자가 관련분야 전문가인데 원서 읽고 번역 없이 토씨와 어순만 우리말로 말하는게 일상인 경우. (용어 번역이 아주 이상하게 나온다.) 또 다른 경우는 흔히 대학에서 벌어지는 일로서, 실제 번역 작업은 비전문가 학생들이 하고 명목상 번역자는 번역 내용 확인 없이 이름만 걸어 놓은 경우. 또 오래전 나를 원서로 몰아간 번역서처럼 번역자가 관련분야 전문지식이 부족하지만 일본어가 상대적으로 우리말로 옮기기 쉽다는 이유만으로 일본어 번역본을 우리말로 다시 번역한 경우. 어떤 경우에 해당하건 이 책은 오락용/휴식용 소설류가 아니면 번역서는 멀리 하는게 시간과 돈을 모두 아끼는 법이라는 교훈에 증거물을 하나 더 추가시킨다. (검색 해본 결과, 실제로 이 책은 번역본보다 원서를 20% 정도 더 싸게 구할 수 있다.)

그래도 번역본이 좋은 점:

  1. 멋진 하드커버와 절 번호 장식은 눈이 즐겁다. 책꽂이에 꽂아도 폼 난다. 카페에 들고 가면 훌륭한 악세사리가 된다.
  2. 글씨가 큼직큼직하고 종이가 두껍다. 그래서 별로 많이 읽지 않아도 넘긴 두께가 꽤 되어 보이고 근거없는 성취감에 뿌듯하다.
  3. 원전에서는 영어로만 번역되어 적힌 작품명들이 독일어 원제까지 나와서 원서 읽는 사람보다 뭔가 더 배우는 듯한 기분이 들어 이유없이 흐뭇하다.

그딴게 무슨 장점이냐고 생각한다면 더 싸고 정확한 원서를 읽는게 나을 것으로 보인다. 책의 내용에 대한 제대로 된 이야기는 나도 원서를 읽고나서 내가 번역서에서 읽었던게 엉뚱한 말이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나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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